무려 약 25년만의 재독(再讀).
내가 이 책을 처음 사서 읽은 것은 1994년.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그 당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얼마나 유명하길래 다들 이렇게 읽는 것일까?'라는 생각에 나역시 사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책의 내용을 들여다 보자.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읽는 사람의 입장이 어떤가에 따라 그 책의 내용마저 달라진 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책은 작가가 만들지만 독자가 완성하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말 그대로 열혈청년이었던 스무살 때였다. 그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무엇이든 해야만 했던 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무엇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나이였다.
그 당시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나와는 너무도 다른 '같은 나이 대에 있는 청춘들의 '방황 이야기'에 거의 공감할 수 없었다. 또한, 너무도 쉽게 남녀간의 관계가 형성되고 또 그에 대해서 아무런 거리낌도 없다는 것에, 일본이 아닌 '서양 어디쯤'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인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스무살의 나에게 있어《상실의 시대》는그다지 공감하지 못한 채로 책장에 꽂힐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20여년도 더 지나도록 몇 번의 이사와 몇 번의 책 정리라는 위기를 넘기고 아직도 내 책장에 꽂혀 있던《상실의 시대》.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집중독서로서 순서대로 읽다가 드디어 다시 만나게 되었다.
책에는 자의든 타의든 세상을 등지게 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주인공 나(와타나베)의 입장에서 보면, 직접 만나게 되는 사람도 그렇고, 그들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그렇다. 어떤 아픔들을 가지고 있기에 자살을 하는지도 각자가 다 다르다. 어쨌거나 누군가는 자신의 삶의 마지막으로 '자살'을 선택한 것이고, 그들의 곁에 있던 사람은 '삶'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남은 사람은 그렇게 사라져간 사람들의 기억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아간다. 이 책의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었지만 국내에는
■ 이 소설의 원제 《노르웨이의 숲》은 오늘의 젊은 세대들의 원색적인 욕망과 절망적인 상실의 갈등을 노래한 비틀즈의 유명한 노래 <노르웨이의 숲>을 상징적으로 쓴 것임.
각자에게 살아온 날들은 서로가 다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가 경험했던 모든 것을 잃었다는 '상실'로 인하여 '삶의 마감'을 택한다. 내가 스무살에 이 책을 읽었을 때 결정적으로 공감하지 못한 것이 바로 이 '상실감'이 아니었을까.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해서 무엇이든지 해보고 싶은 때. 이전까지의 학창시절과는 전혀 다른 '최고의 자유'를 맛보고 있었을 때. 경제적 자유는 없었을 지언정, 시간적 자유만큼은 최고를 느낄 수 있었을 때. 그런 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상실감'이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의 기억에 '상실'이란 무엇일까?
두 분의 부모님도 돌아가셨고, 친한 선배/친구의 죽음도 경험하였다. 그렇게 곁에 있는 누군가를 잃어버리는 '상실감' 내 경험중에 가장 큰 상실은 역시 '죽음'이었다. 그런 주위의 '죽음'을 통해서 나 자신의 존재감. 살아있음에 대한 고마움은 더욱 커져만 간다. 그렇게 삶을 살아오면서 경험해 왔던 모든 것이 나에게 있어 '상실의 시대'였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그 경험을 통해서 얻은 것은 '삶에 대한 더욱 커다란 욕망'이다.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더욱 열심히 살고 싶게 만드는 욕망. 아마도 이 책 속의 주인공들에게 있어서는 그런 '욕망'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을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은 지금까지 많이 읽어보진 못했다. 하지만 이전에 읽었던 책과 이 책은 그 흡입력에 있어서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하다. 사실, 솔직히 말해서 재미있는 책은 계속해서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 지는 그런 책이 아니었던가. 이 책이 그렇다. 한 번 손에 잡고서는 기어이 끝까지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책. 내가 지금 다시 읽은《상실의 시대》가 그런 책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는 일지만, 만약 내가 서른 살에 이 책을 다시 읽었었다면 어땠을까? 책의 내용이 당시 나에게 있어 스무살과, 마흔살이 아닌 서른 살의 나에게 있어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어떤 계기가 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상실의 시대
- 작가
- 무라카미 하루키
- 출판
- 문학사상사
- 발매
- 2010.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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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7)
기억이란 건 아무래도 이상한 것이다. 거기에 실제로 내가 있었을 때 나는 그런 풍경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특별히 인상적인 풍경이라는 느낌도 없었고, 더구나 18년 후에 그 풍경을 선명하게 기억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때 나에겐 그런 풍경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P44)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으며, 그때 내 곁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아름다운 한 여인에 대해 생각했고, 나와 그녀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그때는 무엇을 보든, 무엇을 느끼든, 무엇을 생각하든, 결국 모든 것은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그런 나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랑은 몹시 복잡한 곳으로 나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주위의 풍경에 마음을 쓸 여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봐요, 와타나베. 날 좋아해요?"
"물론이지."
"그럼 내 부탁을 두 가지만 들어줄래요?"
"세 가지라도 들어주지."
그녀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두 가지면 그만이에요. 두 가지면 충분해요. 하나는 당신이 이렇게 날 만나러 와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해요. 정말 기쁘고, 정말 구제받은 것 같아요. 혹시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해도 말이에요."
"또 만나러 올 거야. 다른 하나는 뭐지?"
"나를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해요. 내가 존재해서 이렇게 당신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언제가지라도 기억해 줄래요?"
"물론 언제까지라도 기억하지"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드는 가을 햇살이 그녀의 어깨 위에서 하늘하늘 춤추고 있었다.
또다시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왔는데, 그것은 조금 전보다는 훨씬 가까운 곳에서 들려 오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작은 언덕 같은 곳으로 오르더니 소나무 숲에서 나와, 비스듬한 비탈길을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녀의 두세 걸음 뒤에서 걸어갔다.
"이쪽으로 와, 주위에 우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그녀의 등 뒤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빙긋이 웃으며 내 팔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남은 길을 둘이서 나란히 걸어갔다.
"정말 언제까지라도 잊지 않을 거죠?"
그녀는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언제까지라도 기억하고말고. 내가 나오코를 잊을 까닭이 없지."
P71)
죽음은 삶의 대극(大極)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
말로 해버리면 평범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것을 말로서가 아니라 몸 안에 있는 하나의 공기 덩어리로서 느꼈던 것이다. 당구대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빨간색과 하얀색으로 된 네개의 공 안에도 죽음은 존재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마치 미세한 티끌처럼 폐속으로 들이마시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삶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었다. 즉 '죽음은 언젠가는 확실히 우리들을 그 손아귀에 넣는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죽음이 우리들을 잡는 그날까지 우리들은 죽음에 잡히는 일이 없는 것이다' 하고.
그것은 나에게 지극히 당연하고 논리적인 명제로 생각되었다. 삶은 이쪽에 있으며, 죽음은 저쪽에 있다. 나는 이쪽에 있고, 저쪽에는 없다.
그러나 가즈키가 죽은 밤을 경계선으로 하여, 나로선 이제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죽음을(그리고 삶을) 파악할 수는 없게 되었다. 죽음은 삶의 대극적 존재 따위가 아니었다.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 사실은 제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망각해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저 열일곱 살의 5월 어느 날 밤에 기즈키를 사로잡은 죽음은, 그때 동시에 나를 사로집가도 했던 것이다.
나는 그런 공기 덩어리를 몸 속에 느끼면서 열여덟 살의 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심각해지지 않으려고도 노력했다.심각해진다는 것이 반드시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어슴푸레하게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죽음은 심각한 사실이었다. 나는 그런 숨막히는 배반성(背反性) 속에서 끝없는 제자리 걸음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것은 확실히 기묘한 나날이었다. 삶의 한복판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P100)
7월 초에 나오코로부터 편지가 왔다. 길지 않은 편지였다.
답장이 늦어져서 미안해요. 하지만 이해해 줘요. 글을 잘 쓸 수 있게끔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까요. 그리고 이 편지도 벌써 열 번이나 다시 썼는 걸요. 글을 쓴다는 것은 나로선 아주 고역이에요.
결론부터 쓰겠어요. 하는 수 없이 대학을 1년 간 휴학하기로 했어요. 하는 수 없다고는 했지만,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는 일은 아마 없지 않을까 생각해요. 휴학이란 말은 어디까지나 절차상의 일이니까요.
갑작스런 이야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훨신 전부터 생각해 왔던 일이에요. 그 점에 대해서는 몇 번인가 이야기하려고 마음먹었지만, 끝내 말문을 열지 못하고 말았어요. 입 밖에 내는 일이 몹시 두려웠거든요.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설령 무슨 일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또 설령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은 이렇게 돼 있지 않을까 해요. 어쩌면 이런 말이 당신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르겠군요. 만일 그렇다면 사과하겠어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 일로 해서 당신이 자신을 책망 하지는 말아 달라는 것이에요. 요 일년 남짓한 동안 나는 그것을 미루고 미루어 왔으며, 그 때문에 당신한테도 많은 폐를 끼쳤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내 한계겠지요.
고쿠분지의 아파트를 떠난 다음, 나는 고베의 집으로 돌아와 잠시 병원에 다녔어요. 의사 선생님 이야기로는 교토의 산 속에 나에게 적당한 요양소가 있다고 하니, 잠시 거기 들어가 볼까 해요. 엄격한 의미에서의 병원이 아니고 훨씬 자유로운, 요양을 위한 시설이래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쓰기로 하겠어요. 지금은 아직 제대로 쓸 수가 없으니까요. 현재의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바깥 세계와 차단된, 어딘가 조용한 곳에서 신경을 절대적으로 안정시키는 일이에요.
당신이 1년 동안 내 곁에 있어 준 데 대해서, 나는 내 나름대로 감사하고 있어요. 그것만은 믿어 주세요. 당신이 나에게 상처를 준 것은 결코 아니니까요. 나에게 상처를 준 것은 나 자신이에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나는 아직 당신을 만날 준비가 돼 있지 않아요.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만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뜻이에요. 만약 준비가 됐다 싶을 때, 나는 즉시 당신에게 편지를 쓰겠어요. 그 때가 되면 우리는 좀더 서로에 대해 잘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당신의 말대로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좀더 알아야 하겠지요. 안녕히.
P154)
화재가 수습되고 나자, 미도리는 어쩐지 얼이 빠져 버린 것만 같았다. 몸의 힘을 빼고 멍청하니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지쳤어?"
"그렇진 않아요"하고 그너는 말을 이었다. "...... 오랜만에 힘을 빼본 것뿐이에요. 멍하니......"
내가 그녀의 눈을 보자, 그녀도 내 눈을 보았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입맞춤을 했다. 그녀는 아주 약간만 으쓱 어깨를 움직였으나, 이내 다시 몸의 힘을 빼고 눈을 감았다. 5초 아니면 6초, 우리는 가만히 입술을 맞추고 있었다.
초가을의 햇살이 그녀의 뺨 위에 속눈썹 그림자를 드리워 그것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부드럽고 평온하고, 그리고 어디로 간다는 목표도 없는 입맞춤이었다.
오후의 햇살 속에서 옥상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불구경을 하고 있지만 않았던들, 나는 그날 그녀에게 입맞춤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기분은 그녀 쪽도 같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옥상에서 반짝거리는 집집의 지붕이며 연기며 고추잠자리며, 그런 것들을 줄곧 바라보다가 따스하고 친밀한 기분이 들어. 그것을 무슨 형태로나 남겨 놓고 싶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의 입맞춤은 그러한 타입의 입맞춤이었다. 그러나 물론 온갖 입맞춤이 그러하듯, 어느 정도의 위험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건 아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미도리였다. 그녀는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리고 어쩐지 말하기 거북한 듯이 자신에게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건 나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선배도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요?"
"있지."
"그런데 왜 일요일엔 언제나 한가하죠?"
"매우 복잡해."
그리고 나는 초가을 오후의 잠깐 동안의 마력(魔力)이, 이미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음을 알았다.
P200)
"<노르웨이의 숲>을 부탁해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레이코 여사가 부엌에서, 고양이 모양의 저금통을 들고 오자, 나오코가 지갑에서 1백 엔 짜리 동전을 꺼내어 거기에 넣었다.
"뭡니까, 그거?" 하고 내가 물었다.
"내가 <노르웨이의 숲>을 신청할 땐 여기에 1백 엔씩 넣게 돼 있어요. 이 곡을 제일 좋아하니까, 특별히 그렇게 정했어요. 정성을 담아 신청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돈이 내 담배 값이 되는 거지" 하고 레이코 여사는 덧붙이고 나서 손가락을 주물러 풀고는 <노르웨이의 숲>을 연주했다.
그녀가 치는 곡엔 정성이 깃들어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감정이 지나치게 흐르는 적은 없었다. 나도 주머니에서 1백 엔짜리 동전을 꺼내어 그 저금통에 넣었다.
"고마워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방긋이 웃었다.
"이 곡을 들으면 난 가끔 무척 슬퍼질 때가 있어요. 왜 그런지 모르지만 내가 깊은 숲 속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감정에 휩싸여요"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혼자서 외롭고 춥고, 그리고 어둡고, 아무도 구해 주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내가 신청하지 않으면 레이코 언니는 이곡을 연주하지 않아요."
P253)
"언니가 죽어 있는 걸 발견한 건 나였어요" 하고 나오코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국민 학교 6학년 때의 가을이었어요. 11월이었죠. 비가 오고, 음산한 하루였어요. 그때 언니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어요. 내가 피아노 레슨을 받고 집에 오니까 여섯 시 반, 어머니가 저녁 준비를 하면서 식사를 할 테니까 언니를 불러 오라고 하는 거예요. 2층에 올라가서 언니 방을 노크하곤 밥 먹어, 하고 큰소리로 불렀죠. 그런데 대답은 없고 조용하기만 하잖아요. 어쩐지 이상한 것 같아서 또 한 번 노크를 하고, 살며시 문을 열고 들여다봤어요. 잠이 들었는가 해서 말이에요. 그런데 언니는 자고 있지 않았어요. 창가에 서서, 목을 이렇게 옆으로 수그리고는 밖을 골똘히 내다보고 있었어요. 무슨 생각엔가 잠겨 있는 것 같았어요. 방은 어두운데 불도 켜 있지 않아서 모든 게 어슴푸레하고 잘 보이질 않았어요. 난 '뭘 하고 있어, 언니? 밥 먹으래' 하고 말을 걸었어요. 그러면서 보니까 언니가 여느때보다 키가 커 있지 뭐예요. 왜 이러지? 하이힐을 신고 있나, 아니면 어디에 올라서 있는 건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며 가까이 다가가 말을 하려는 순간, 난 그걸 봤어요. 목에 줄이 매달려 있는 거예요. 천장에서 줄이 일직선으로 내려와 있었어요 - 그게 글쎄 놀라울 만큼 곧은 거예요. 꼭 자를 대고 허공에다 일직선을 그어 놓은 것 같았어요. 언니는 흰 블라우스에다 -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이런 심플한 거였어요 - 회색 스커트를 입었고, 발끝을 마치 발레를 하고 있는 것처럼 쭉 뻗고 있었어요. 그래서, 마루와 발가락 끝 사이에 20센티미터 정도 빈 공간이 나 있었지요. 그런 세밀한 것까지 난 다 봤어요. 얼굴도 봐 버려썽요. 안 볼 수가 없었어요. 빨리 아래로 내려가서 어머니한테 알려야지, 고함을 질러야지, 하면서도 몸이 말을 안 들었어요. 내 의식과는 별도로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어요. 내 의식은 빨리 어머니한테 가야지 하는데, 몸은 어느새 언니를 끈에서 풀어 주려고 허둥거리고 있었던 거예요. 물론 내 힘으로 그게 될 리가 없었고, 5, 6분 동안 나는 거기서 멍하니 있었나 봐요. 방심 상태로, 뭐가 뭔지 갈피가 안 잡히고, 내 몸 속의 뭔가가 죽어 있는 것 같았어요. 어머니가 '뭘 하고 있니?' 하면서 올라올 때까지 난 줄곧 거기에 있었어요. 언니와 함께 그 어둡고 차가운 곳에......'
P330)
일요일 아침, 나는 나오코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편지에다 미도리 부친의 이야기를 썼다.
나는 같은 클래스에서 공부하는 여학생 부친의 병문안을 갔다가 오이를 먹었다. 그랬더니 그도 그걸 먹고 싶어 해서 드렸더니 아작아작 베어 드셨다. 하지만 결국 5일 뒤의 아침에 세상을 떴다.
나는 그가 아작아작 오이를 씹고 있던 소리를 지금도 이거하고 있다. 사람의 죽음이란 것은 작고도 묘한 추억들을 뒤에 남기고 가는 모양이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너와 레이코 여사와 새집을 생각한다.
공작새나 비둘기, 앵무새와 칠면조, 그리고 토끼 생각을, 또한 비 내리는 아침에 너와 거기 사람들이 입고 있던, 모자가 달린 노란 비옷도 기억하고 있다.
따뜻한 침대 속에서 너를 생각하다 보면 참으로 기분이 흐뭇해진다. 마치 내 곁에서, 네가 새우등을 한 채 잠들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것이 만일 정말이라면 얼마나 근사한가,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때때로 지독히 외로운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대로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네가 매일 아침 새들을 돌보고 밭일을 하는 것처럼, 나도 매일 아침 내 자신의 태엽을 감고 있다.
침대에서 나와 이를 닦고, 수염을 깎고, 아침 식사를 하고, 옷을 갈아 입고, 기숙사 현관을 나서서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대략 36회 정도 빠득빠득 태엽을 감는다. 너를 만날 수 없어 괴롭긴 하지만, 그나마 네가 존재해 있다는 사실이 도쿄에서의 생활을 그럭저럭 견디게 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 속에서 널 생각함으로써, 자, 태엽을 감고 오늘 하루도 성실하게 살자 하는 마음을 다지게 되는 것이다. 나 자신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나는 요즘 자주 혼잣말을 하는 것 같다. 아마 태엽을 감으면서 불쑥불쑥 무엇인가 중얼거리는 모양이다.
하지만 오늘은 일요일이어서 태엽을 감지 않아도 되는 아침이다. 빨래를 끝내고 지금 방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 이 편지를 다 쓰고는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어 버리면, 저녁 때까지 아무런 할 일이 없다. 일요일엔 공부도 하지 않는다. 나는 평일의 강의 시간 짬짬이 도서실에서 착실하게 공부를 하고 있으니까 일요일이라고 해서 달리 공부할 것도 없다.
일요일 오후는 조용하고 평화로우며, 그리고 고독하다. 나는 혼자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한다. 네가 도쿄에 있었을 무렵의 일요일에 너와 둘이서 거닐었던 길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볼 때도 있다. 네가 입고 있던 옷가지들도 매우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일요일 오후엔 나는 정말로 여러 가지 기억들을 되살리곤 한다.
레이코 여사에게도 안부 전해 주기 바란다. 밤이 되면 그녀의 기타 소리가 한없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P436)
나오코가 죽은 뒤에도 레이코 여사는 내게 몇 번이나 편지를 보내, 그것은 내 탓도 아니고 그 누구의 탓도 아니며, 그것은 비가 내리는 것처럼 누구도 멈출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서 답장을 쓰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좋은가? 게다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나오코는 이미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한 줌의 재가 돼버린 것이다.
8월 말 나오코의 장례식이 조용히 끝나자, 나는 도쿄로 돌아와 주인에게 당분간 집을 비우겠으니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하고, 아르바이트 직장에는 죄송하지만 당분간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도리에게는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나쁘다고는 생각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하는 짤막한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3일 동안 매일, 영화관을 돌며 아침부터 밤까지 영화를 보았다. 도쿄에서 개봉되는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나는 배낭에 짐을 꾸리고, 돈을 남김없이 찾은 다음, 신주쿠 역으로 가서 바로 출발하는 급행 열차를 탔다.
도대체 어디를 어떤 식으로 돌아왔는지 나로서는 전혀 생각해 낼 수가 없다. 풍경이나 냄새나 소리는 꽤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지명이란 것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갔는지 차례도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기차나 버스로, 때로는 지나가는 트럭 조수석을 얻어타고 한 도시에서 다음 도시로 이동했으며, 공터나 역, 공원이나 냇가, 해안, 그 밖에 잠을 잘 만한 곳이 있으면 어디서든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잤다. 파출소 한 구석을 빌려 잔 적도 있고, 묘지 언저리에서 잔 적도 있다. 사람들 왕래에 방해가 되지 않고, 편히 잠잘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걷다 지친 몸을 침낭 속에 묻고 싸구려 위스키를 꿀꺽꿀꺽 마시고는 곧 잠들었다. 친절한 도시를 만나면 사람들이 음식을 갖다 주기도 하고, 모기향을 주기도 하였지만, 불친절한 도시에선 사람들이 경찰을 불러 나를 공원에서 내쫓았다. 어느 쪽이든 나로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구하고 있었던 것은 모르는 도시에서 푹 잠을 자는 일뿐이었다.
P440)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이런 것이었다. 어떠한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떠한 진리도 어떠한 성실함도 어떠한 강함도 어떠한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마음껏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 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 그 밤의 파도 소리를 듣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매일처럼 골똘히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위스키를 몇 병씩이나 비우고, 빵을 씹고, 수통의 물을 마시고, 머리를 모래투성이로 만든 채, 배낭을 메고 초가을의 해안을 서쪽에서 서쪽으로 걸었다.
P443)
한 달 동안의 여행은 나의 심경을 북돋아 주지도 못했고, 나오코의 죽음이 나에게 준 충격을 가볍게 해주지도 않았다. 나는 한 달 전과 별다른 변화가 없는 상태를 한 채 도쿄로 돌아왔다.
미도리에게 전화조차 걸 수 없었다. 도대체 그녀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뭐라고 해야 하는가? 모든 게 이제 끝났어, 우리 둘이서 행복하게 지내자...... 그렇게 말하면 좋은 것일까? 물론 나로서는 그런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말하든, 어떤 표현을 빌리든, 결국 말해야 할 사실은 하나인 것이다. 나오코는 죽었고, 미도리는 남아 있는 것이다. 나오코는 흰 재가 되었고, 미도리는 살아 있는 인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이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는 인간처럼 느껴졌다.
도쿄에 돌아와서도 혼자서 방안에 틀어박혀 며칠인가를 보냈다.
나의 기억 대부분은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에게 이어져 있었다. 내가 나오코를 위해 마련해둔 몇 개인가의 방에는 쇠사슬이 늘어져 있었고, 가구는 흰 천으로 덮여 있었으며, 창틀에는 보얗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그런 방안에서 보냈다. 그리고 나는 기즈키를 생각했다. 이봐, 기즈키. 너는 기어코 나오코를 손에 넣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 좋아, 나오코는 원래 네 것이었으니까. 결국은 그녀가 가아햘 장소였겠지, 아마.
하지만 이 세계에서, 이 불완전한 산 자의 세계에서, 나는 나오코에게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 그리고 나는 나오코와 둘이서 어떻게든 새로운 삶을 구축하려고 노력했어. 그렇지만 괜찮아, 기즈키. 나오코는 네게 줄게. 나오코는 네 쪽을 택했으니까. 그녀 자신의 마음처럼 어두운 숲 깊은 곳에서 목을 맨 거야.
이봐 기즈키. 너는 옛날 나의 일부를 죽은 자의 세계로 끌고 들어갔어. 때때로 나는 박물관의 관리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누구 하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휑뎅그렁한 박물관 말이야. 나는 내 자신을 위해 그것을 관리하고 있는 거야.